흙은 무엇을 원하는가
조새미 / 미술비평, 미술학박사
조새미 / 미술비평, 미술학박사
2020년 노벨 문학상은 미국 시인 루이즈 그릭Louise Glück b. 1943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시 <야생붓꽃 The Wild Iris>에서 화자는 야생붓꽃의 구근이다. 야생붓꽃의 구근은 갈라진 흙과 흙 사이에서 햇빛을 본다. 어두운 땅속에서 구근은 의식을 가지고 살아있기에 흙은 잠들게 되는 장소이기보다는 아기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깨고 나와야 할 껍질이자 빛을 향해 있는 문이다. 흙은 죽음과 삶을 동시에 인지하게 하는 경계이자 삶으로의 통로이다. 시인은 구근이 피어나는 순간이 우리가 “고통의 끝에 있는 문을 열고”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의 순간이라고 말한다. 인고의 시간 끝, 우리가 열게 되는 문이 바로 ‘흙’이다.
시인의 시 안에서 흙과 미술가, 조형예술가가 다루는 흙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시와 미술은 상호작용을 하며 발전해 왔다. 예를 들어 로마 공화정 말기 시인이었던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B.C. 65~B.C. 8가 『시학Ars Poetica』에서 언급했던 “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라는 고전 경구를 생각해볼 수 있다. 시각 문화 연구자인 미첼W. J. T. Mitchell b. 1942은 “시를 그림과 비교하는 것은 은유를 만드는 것이고, 시를 그림과 구별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1 라고도 했다. 그림과 도예를 같은 범주 안에서 생각할 수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도예를 일상의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 가두지만 않는다면, 시와 흙을 소재로 한 예술의 관계를 탐구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다.
이를 위해 네 명의 작가의 작품에 관해 논의해보고자 한다. 작가가 가지는 자유라는 특권은 흙이라는 매체와의 관계에 있어 어떻게 조정될 수 있을까? 인간은 조형예술의 재료인 흙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특권의 수혜자일 뿐인가? 우리는 흙의 속삭임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흙은 무엇을 원하는가? 흙과의 교감 없이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을 수 있는 도예가가 있으랴만 이 글에서는 도예가의 작품에 한정하지 않고, 일련의 물질적 실천으로서, 흙에 관해 철학적으로 탐구하며 흙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작가와 작품에 주목했다.
(중략)
흙의 속삭임 / 곽인식
날 것 그대로의 점토 / 피비 커밍스
시간과 「거석」/ 신미경
(중략)
흙을 돌보는 이유 / 오세린
오세린b. 1987은 액세서리를 수집해 이를 다시 조합하는 방법으로 장신구를 만들어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오리지널, 복제, 모방의 함수 관계를 탐구해 왔다. 동양화와 금속공예를 전공한 작가는 2016년 저가 액세서리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공장과 사람들을 찾아 중국과 베트남에서 3개월간 체류했다. “진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 「새들은 날기 위해 머리를 없앤다」2016~2018, 「푸톈福田을 가로지르며」 2016~2018와 같은 영상을 제작했다. 작가는 2019년 저널리스트와 같은 태도를 유지하는 이러한 작업에서 방향을 틀어 자신의 가족에 관한 「흙을 돌보는 시간」 2019과 「담바구」 2019를 제작했다. 이 두 작업에서 ‘흙’은 핵심적 매개체이다.
흙을 돌보는 시간
가변크기ㅣ 할아버지가 농사짓던 마을의 흙, 조형토, 합판 위에 페인트와 연필 ㅣ 2019
「흙을 돌보는 시간」은 세라믹 액자를 중심으로 한 설치 작업이다. 나뭇결이 살아있는 벽면에 10여 개의 액자가 걸려 있다. 온전한 액자도 있지만 깨지거나 금이 간 것이 대부분이다. 이 액자는 무엇인가? 작가의 외조부는 7년 전부터 치매로 기억을 잃기 시작했다.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된 그는 시내로 이사해 주간보호센터에 다닌다. 가족들은 센터에 다니는 것을 거부하는 그를 위해 당신이 노래를 가르치러 그곳에 가는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통장에 가짜 월급을 넣어주었다. 작가는 어느 날 폐가가 된 외조부의 시골집을 방문해 마당, 텃밭, 화단 등에서 흙을 퍼 작업실로 가져왔다. 흙을 모래와 진흙으로 분리해 점토와 유약을 만들고 돌멩이는 버렸다. 「흙을 돌보는 시간」에 설치된 액자는 바로 이 점토와 유약으로 만든 결과였다.
작가는 액자의 표면을 갖가지 식물 모티프를 적용해 장식했다. 이 식물의 정체는 열무꽃 등으로 외조부가 치매에 걸리기 전 농사짓던 작물이다. 이와 더불어 자신이 무형문화재라고 믿는 할아버지의 망상을 실제처럼 믿게 만드는 가짜 기념비도 설치되어 있다. 이 세라믹 기념비는 ‘무형문화재’라고 조각되어있고 무엇인가 축하하듯 리본으로 장식되었다. 대부분의 액자 프레임 안쪽은 벽면의 표면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지만 몇몇 액자로부터는 영상을 볼 수 있다. 관람객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액자가 걸린 벽 뒤에 또 다른 공간이 있으며, 전면에 위치한 벽면에 7분 30초 길이 단채널 비디오 「담바구」가 상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담바구 ㅣ 단채널비디오(7분 30초) ㅣ2019
쭈그리고 앉아 흙을 푸는 작가의 모습을 배경으로 작가의 어머니와 외조부의 전화 통화 내용이 들린다. 영상이 상영되는 벽면의 양쪽 옆으로 작가가 외조부의 빈 집을 방문했을 때 가져온 서예 액자와 어머니가 학생 시절 만들었던 자수 작품 등이 벽에 기대어져 있다. 그 어두운 공간은 마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실체의 그림자이고 허구와 거짓말인가? 그렇지 않다. 실재인 것이 있다. 오세린은 신체의 마디마디를 굽혀 분절하는 노동을 통해 땅을 호미로 파헤쳤고, 흙을 통에 담아 옮겼으며, 물 아래 가라앉은 흙을 치대어 점토를 만들었다. 이 과정은 실재였고 해당 점토로 만든 액자는 실질적 노동의 증거물이다.
그렇다면 오세린은 왜 외조부의 병환으로부터 비롯된 가족의 거짓말에 어떤 식으로든 기여하는 것이 좋겠다는 자발적인 결정을 했나? 프랑스 인류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는 1925년 저작 『증여론 Essai sur le don』에서 원시사회와 고대 문명사회에서 선물을 주고받는 다양한 형태와 성격, 방식 및 사회적 기능에 관해 기술했다. 모스가 언급했던 총체적인 급부 체계le système des prestation totale로서의 포틀레치potlach는 원래 북미 인디언 및 백인들이 사용하던 방언으로, ‘식사를 제공하다’ 또는 ‘소비하다’라는 의미를 가지는데9 모스는 총체적 급부 체계의 양상을 띠는 다른 원시 사회들의 증여교환 체계를 일반적으로 포틀래치라고 칭했다. 이러한 포틀래치의 부와 재화의 교환에는 의무가 내포되어 있다. 선물은 자발적으로 단순히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기-받기-답례하기의 과정을 권리와 의무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또한 원시 사회의 구성원들은 동일 씨족에 속하는 사물들과 개인 및 집단 사이에는 영적 유대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같은 토템 명을 가진 모든 물건과 사람은 동일한 죽은 조상이나 신들에게서 유래했으며 그것들 속에 영적인 힘이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받은 선물 속에 선물 제공자의 권위, 위세 및 영혼의 일부가 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선물을 받은 자는 자신들의 재산, 소유물, 노동, 상품 등으로 증여자에게 답례할 때까지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10 이론이다. 반대의 입장에서 영국의 진화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1941~는 1976년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인간은 생존 기계이며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를 보존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운반자”11라고 기술했다. 작가는 외조부와의 관계를 포틀레치와 같은 일종의 선물로 보았던 것인가? 아니면 유전자로 이어진 생존 기계로 본 것인가? 오세린이 흙이라는 매개를 통해 수행했던 활동을 유전자 증여에 대한 답례로 볼 수 있는가?
담바구 (스틸컷) ㅣ단채널비디오(7분 30초) ㅣ2019
작가의 외조부만이 처음부터 그 땅에서 농사지었던 것은 아니련만 그 땅은 어느새 외조부 그 자신이 되었고 일종의 신화적 장소가 되었다. 미국의 예술평론가이자 문화 비평가인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 b. 1961은 한 장소에 사는 사람들이 그 장소에 대해 느끼는 애착을 설명하면서 피와 흙이라는 이미지를 동원하는데, ‘근본적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매개로 흙과 피만큼 선동적인 소재도 드물다고 기술했다.12 “흙이 신선해지면 생명의 순환이 시작된다. 흙은 부패와 재생의 축제”라는 솔닛의 경구는 흙과 피의 연관성을 걷어내는 동시에 흙에 관한 과학적이며 문학적인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뿌리, 핏줄, 기억, 흙. 무엇을 강조하든 오세린을 키운 것은 포천의 땅은 아닐 텐데, 그런데도 작가가 그 땅으로 향했던 이유는 아마도 답례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담바구」와 「흙을 돌보는 시간」은 주어야 할 의무, 받아야 할 의무, 되돌려 주어야할 의무, 호혜성과 교환에 관한 가족 안의 수수께끼를 푸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두 작업은 자신의 정신적, 물질적 요소가 중립적일 수 있도록 삶의 무게 중심을 찾아가는 작가만의 여정이었다. 가짜와 진짜, 자본주의 사회 안의 교환과 상품의 원리를 탐구했던 오세린의 작업이 ‘흙’이라는 매개를 통해 가족 내의 의무 수행에 관한 이타적 행위의 근원 찾기로 이어졌다.
흙은 무엇을 원하는가?
흙으로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작업의 유형이다. 불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점토를 내구성을 갖춘 도기로 변화시킨다는 사실을 안 2만 5천 년 전 이후로 인간은 흙과 관련된 활동을 산업적 양상으로, 또 예술의 한 형식으로 발전시켰다. 언택트 예술과 콘택트 예술로도 예술의 분류가 가능한 시대가 되어버린 21세기 초 현재, 흙의 시적 맥락을 따라 작가들의 작품에 관해 논의해보는 시도는 도예의 미래지향적 가능성을 열어준다. 관객이 흙의 목소리를 듣기를 원했던 곽인식, 날 것 그대로의 흙의 붕괴 과정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삶을 발견하고자 하는 커밍스, 시간의 파편으로서의 흙을 조형 재료로 다루는 신미경, 흙을 통해 가족 내의 의무 수행에 관한 이타적 행위의 근원을 탐구하는 오세린의 작품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우리는 흙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사유할 수 있다. 이들의 작업 과정에서 드러나는 흙과의 상호작용은 철학적, 문학적, 비교예술학적, 인류학적 면면을 보여주며 흙이 대상화된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주체적 면모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이로부터 우리는 인간의 이성과 판단력에 관한 성찰로부터 탄생했던 예술이라는 인간 중심적 활동에 의문을 제기하고 과연 예술의 주인은 인간뿐이냐는 질문도 할 수 있다. 재료를 구축하여 아름다운 대상을 만드는 일에 만족할 수 없다면, 그 재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것도 방법일 수 있다.
1) W. J. T. Mitchell, Iconology: Image, Text, Ideology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6), p. 49.
9) 마르셀 모스, 『증여론』, 류정아 옮김(서울: 지식을만드는지식, 2011), p. 26.
10) 김현자,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 인문논총 제68집(2012), pp. 495-508, p.502.
11)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홍영남, 이상임 옮김(서울: 을유문화사, 2018), p. 33.
12) 리베카 솔닛, 『마음의 발걸음』, 김정아 옮김(서울: 반비, 2020), p. 299.
13) ibid., p. 301.